부모는 아이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부모역할을 할 때는 적어도 5가지는 기본적으로 해주어야 합니다. 첫째로 아이에게 존재의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자리도 자리이지만 상징적인 자리도 자리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을 때 맨 처음의 아이의 자리는 엄마의 자궁입니다. 바로 그곳이 아이의 자리가 됩니다.
그 자리가 환영받고, 기뻐해주고, 존중받는 자리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해서 원하지 않은 아이가 생겼을 때, 그 아이는 자기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온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영적으로, 신체적으로, 호르몬 적으로, 신경체계적으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몸으로 나타납니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걷는 모습입니다. 걷는 모습이 확실하지가 않거나 몸을 붕붕 뛰는 듯이 걷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자리에 뿌리가 확실하게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아직 못 찾은 것입니다.
원치 않은 아이는 꼭 성폭행만이 아니라, 집이 가난해서 돈을 조금만 더 벌어서 아이를 낳으려고 했는데 그 전에 아이가 생겼거나, 아이들이 많아서 체력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 이상 아이를 원치 않았을 때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때 엄마나 아빠가 그 아이를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아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온 우주에서 자기자리를 못 찾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시야가 먼저 작용을 하는데 신생아의 시야는 아기 눈에서 엄마 눈 사이 정도의 거리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가까운 것도 안보이고 먼 것도 안 보입니다. 약 25~30cm정도이며 아기를 품에 앉았을 때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 뒤의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임신이나 전쟁 중에 태어나서 도저히 그 아이의 엄마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 때는 그 아이를 외면합니다. 품에 안았을 때 얼굴을 돌려버립니다.
모성대물림 연수를 진행하다보면 딸만 여럿인 집안에 딸로 태어난 사람들의 사연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났는데 3~4번째 딸이어서 부모가 그냥 밖에서 죽게 내버려두라고 했는데 옆집 아주머니나 친척집에서 왔다가 너무 안타까워서 키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났어도 그 집에 자기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 아이들이 인지로는 몰라도 영혼적으로, 몸으로는 압니다. 자기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알버트 패소 박사의 말씀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아이가 ‘으앙’하고 울 때 가족들이 반겨주고 기뻐하고 ‘이야~ 우리 막내 태어났다!’, ‘우리 둘째 태어났다!’, ‘아들이다!’, ‘딸이다!’ 등 이렇게 할 때는 그 아기가 자기자리라는 것을 알고 안심을 하는데, 그게 아닐 때는 자기 존재를 어디다 놓아야 할지를 모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충격은 오래가고 여러 가지 형태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치료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가 외도를 하거나 아이를 모른 척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적, 사회학적 연구를 하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실 남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여자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바로 아이에게 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바람을 피고 싶은 욕구도 많고, 유혹도 많고, 기회도 많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외도를 하게 되면 그 고통이 대가를 그 자녀들이 지게 됩니다. 혹은 자녀의 자녀가 받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닥터 필은 ‘부모가 실컷 음식을 시켜먹고 그 계산서를 자녀에게 넘겨주는 것이 바람피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은 로맨스라고 하면서 즐기고 그 계산서는 자녀가 받게 되는데, 그 계산서에는 수치심, 불안감 등 여러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존재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녀가 적어도 성장을 할 때까지는 해주어야 합니다.
– 최성애 박사 강의 중